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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은 하지만 행하지 못하는 슬픔

결심은 하지만 행하지 못하는 슬픔

 

모든 인간이 지닌 공통된 본성은, 발전에 대한 욕구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실제 모습은 우리의 이런 기대와는 어긋납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맞이하며 정체 속에 있습니다.

 

이 정체의 주범은 변하지 않는 잠재의식 때문입니다. 잠재의식 안에 "나는 게으르다"는 나에 대한 관념이 저장되어 있다면 이것은 현재의식을 통해 내가 게으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나는 약하다."는 관념이 저장되어 있다면 나는 현재의식을 통해 계속 나의 약함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가난하다."는 관념은 계속해서 가난한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끔 합니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진심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즉 게으른 사람이었지만 부지런해지고 싶다면 "난 부지런하고 의지가 있다."라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강해지고 싶다면 "난 강하다."는 것을 새롭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성과 감각을 토대로 진실을 판단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게으르게 살았던 나라면 "난 부지런하다."고 주장할 때 이성은 "넌 그랬던 적도 없었기 때문에 역시 그런 주장은 헛된 것일 뿐이야."라고 강하게 반발합니다. 마찬가지로 몸이 허약하게 오랫동안 살았고 지금도 허약하다면 "난 건강하다"라는 주장에 이성과 감각은 강하게 반발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성과 감각이 말하는 것만 진실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새롭게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잠재의식은 그렇게 잘 변화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잠재의식이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변화가 일어나야 할 곳을 잠재의식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우리의 결심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예전이랑 달라! 반드시 성공할거야!"라는 생각으로 매번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결심이란 것은 현재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잠재의식에 근원을 두고 있는 행동은 항상 예전과 같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 과거를 후회했을까요? 아마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후회하는 데에 보냅니다. 그런데 후회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항상 후회의 끝에는 새로운 내가 되고자 하는 결심도 함께 합니다. 그렇게 따져본다면 우리의 결심은 후회의 숫자만큼 많을 겁니다. 후회 역시도 셀 수 없을 정도니, 결심 역시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겁니다. 그런데 과거의 모습이나 태도, 그리고 과거의 습관과 지금 현재를 비교해본다면 대부분 그리 변한 것이 없으니 우리의 결심 대부분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속습니다. 매번 결심할 때마다 결심의 힘을 과신해서 이번에는 반드시 변할 거야, 라고 속으로 외칩니다. 

 

"오늘의 결심은 예전에 하던 결심들과는 달라! 이번에는 확실히 달라질 수 있어!

 

하지만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과 충동은 잠재의식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다르다는 결심 역시도 예전과 똑같은 헛된 각오가 되면서 사라집니다. 그 현재의식의 외침이 잠재의식을 변화시킬 정도로, 즉 새로운 나에 대한 관념을 가질 정도로 지속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그 커다란 잠재의식의 파도에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결심만 하는 나,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려야 할까?

 

한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제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엉덩이가 들썩이기 시작하더니 컴퓨터 게임이 생각납니다. 결국 책상에 앉은 지 1시간도 못 채우고 일어섭니다. 그러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 납니다. 의지가 없는 아들에게, 왜 그것밖에 못하는지, 누굴 닮아서 그러는지,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계속해서 온갖 비난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학생 본인도 자신의 결심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자학합니다. 난 왜 결심만 하고 지켜내지 못하는지, 난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한지 계속 자신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이건 자학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 순간 조금씩 자신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진심으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즉 "의지 없는," "매번 결심만 하는" 이미지를 진심으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커다란 악순환의 시작입니다. 

 

엉뚱한 가정이겠지만 만약 최면사가 전날 밤 학생에게, '책을 펼치는 순간 지겹다는 생각이 들면서 컴퓨터 게임에 대한 욕구가 간절해진다.'고 암시를 걸었다면 과연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요? 물론 누구도 그런 후최면암시를 걸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영화 올드보이에서나 가능하겠죠. 하지만 그것과 비슷한 일이 그 학생에게 일어났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최면사의 역할을 대신 했습니다. 그들은 공부가 지겨운 것이라는 암시를 심어줬습니다. 부모님의 "공부하라!"라는 말은 공부라는 것은 의무라는 생각을 갖게 했고, "게임을 그만하라!"는 말은 게임은 하고 싶지만 하지 못 할 정도로 재밌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선생님의 "지금 잠깐만 참으면 편해진다."라는 말 속에서는 공부란 역시 지겹다는 암시가, 친구들의 "지겨워!"라는 한탄에도 공부가 지겹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것 이외도 계속해서 주변의 상황들은 공부는 지겨운 것이라는 믿음과 게임은 재밌는 거라는 믿음을 심어줍니다. 게임이 즐거운 것이어야 할 이유도, 공부가 지겨운 것이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그런 것은 하나의 중립적 사물에 연결된 하나의 관념일 뿐입니다. 

 

(중략)

 

우리가 결심한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가혹한 말을 당연히 던져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암시를 받아들인 자신의 무지를 탓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의지가 없다고 자책하거나, 내 결심은 언제나 말뿐이었다고 자책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결심도 잠재의식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의지가 상상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리그파, <네빌링> 77~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