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미적 예술임이 분명할 것으로 기대되는 어떤 작품들에 관하여, 설사 거기에 취미의 점에서는 아무것도 비난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영혼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하는 일이 있다. 어떤 시는 매우 곱고 우아할지는 모르나, 영혼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있다……" I. Kant, 판단력 비판.
대학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어느 봄날, 여느 때처럼 고시원 방을 뭉개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괜시리 일찍 잠에서 깨어 조조할인으로 이창동의 밀양을 보았다.
오후에 알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가 끝나고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봄날의 햇볕을 맞으며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극장 앞 순대국 집으로 가서 정신없이 막걸리 잔을 비웠다.
영화의 마지막, 전도연이 머리칼을 자르던 앞마당에 비친 그 “비밀스런 햇볕”(밀양)의 장면은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다.
당시의 내 신세 탓이었는지 혹은 내 종교적 배경과 영화의 주제와의 관계 때문인지, 또 지나치게 화창했던 그 봄날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날 영화 “밀양”이 내게 덮친 “그 무엇”인가에 대한 경험은 지금까지도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예술적 체험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그 (예술적) 습격을 쉽사리 맨 정신으로는 삼킬 수가 없어 막걸리와 함께 삼켰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그 충격이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충격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나는 그 봄날 “우리에게 사유의 확장을 촉발하는 동시에 감동과 쾌감을 주는 요소”(김상환)를 경험했다고 “간증”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때 내가 느낀 무엇인가가 바로 롤랑 바르트가 명명한
“무딘 의미(sens obtus)", 즉 “기존의 의미체계를 벗어나는 제3의 의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날 이후로 내가 더 이상 “뻔한 영화”는 절대 돈 주고 극장에 보러 가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영화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간다.)
왜냐하면 “뻔한 영화”는 나에게 그때와 같은 균열의 경험을 선사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칸트의 표현으로는 “영혼을 결여하고 있는 것”, 내 표현으로는 “뻔한 것”들은 제 아무리 근사하게 만들었을지라도 더 이상 나에게 어떠한 균열과 확장의 경험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이 바로 “상업으로서의 영화”와 “예술로서의 영화” 사이의 경계선인 것 같다.
관객수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유무, 즉 이미 체계화되고 도식화된 감성, 감정 영역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환기시킬 수 있느냐가 바로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가 나뉘는 경계이리다.
이점 회화, 조각, 그리고 사진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클라이언트의 의뢰 유무가 문제가 아니다.
제 아무리 골방에서 외로움과 가난과 싸우는 척하며 근사한 예술을 만드는 척을 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작업이 기존의 자신을 찢는, 나아가 세계가 만들어 놓은 기존의 코드를 찢을 수 있는 아귀힘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 작업은 그저 “상업 미술”일 뿐이며 잘 해야 꽤 괜찮은 아류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품”들은 당장은 삼류 큐레이터들과 졸부 컬렉터들의 싸구려 눈에 들어 강남 어느 아파트의 거실에 걸릴 수는 있겠지만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영혼이 없는 것들은 곧 썩기 마련이고 썩는 것은 곧 버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먼저 영혼을 가진 작품을 만들어보자.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여 쓰레기를 만들어 당장 배를 불리는 것보다, 다소 거칠었지만 진실했던 여기 이 고흐의 초기 작품처럼 영혼을 가진 작품을 만들어보자.
우리는 예술을 하니까.
2013. 04.19.
일전에 예술이란 걸 하고 싶던 내가 쓴 글.
여전히 이런 알싸한 "와사비 맛"같은 "생의 감각"이 그립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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